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53년 동독 봉기 (문단 편집) === 진행 === 본격적인 대규모 시위는 1953년 6월 16일에 일어났다. 동베를린의 건설 노동자들이 공산당 정부를 비판하며 파업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베를린 도심에서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트럭에 확성기를 달고 베를린 시내를 누비며 총파업을 선동했다. 시위대는 마침내 정부 청사 앞에서 울브리히트 서기장의 응답을 요구했다. 하지만 울브리히트는 몸을 피했고 중공업 장관이 대신 나와 군중 앞에 섰다. 하지만 울브리히트가 나타나지 않자 군중들은 분노했고 야유 속에서 중공업 장관은 자리를 떠나야 했다. 오후가 되자 동베를린에서의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다. 오전에 300명의 건설 노동자들의 가두 시위로 시작된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4만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했다. 급기야 시위대들은 일시적으로 동베를린을 넘어서서 서베를린에 도달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베를린 내에서는 왕래가 가능했기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지식인들이 서베를린으로 [[망명]]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것은 [[1961년]]의 일. 시위대는 이슈를 정치 문제로 확대했고 자유총선거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동베를린에서의 파업의 소식은 삽시간에 동독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6일이 지나기 전에 동독 전역의 200개 이상의 도시와 마을에서 100만 명의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했다. 동독 전체 마을의 약 80%에서 시위가 일어났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지자 다음날 전국적인 시위를 예정하고 해산했다. 위협을 느낀 동독 정부는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미 6월 초에 동독에서 반소련 움직임이 눈에 띄게 증가하자 당시 소련 최고지도자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동독의 주요 인사들을 불러서 일처리를 똑바로 하라고 조인트를 깠다고 한다. 이 시점에 이미 소련군이 개입할 것은 분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 한편 이 소식이 전해지자 소련 역시 큰 당혹감을 느꼈다. 흐루쇼프 등은 베리야의 성급한 개혁조치가 동독 사태를 야기했다며 비판했다. 16일 저녁 소련은 군대를 동원하여 동독 시위를 무력으로 강경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인 17일 아침부터 시위는 한층 격화되어 반체제 민주화 시위로 발전했다. 전날만 하더라도 노동 부담 완화라는 요구 조건에서 보이듯 노동 쟁의의 요소가 강했으나 17일 시위대는 자유선거와 [[발터 울브리히트]]를 비롯한 동독 지도부의 총사퇴를 요구했다. 하지만 17일 새벽 베를린 외곽에 주둔하면 2만명의 소련군이 [[T-34-85]] 탱크를 앞세워 8천여명의 동독 경찰과 함께 베를린 시내로 진주하면서 시위 진압을 시작했다. 계획된 무장 봉기가 아니라 파업에서 촉발된 즉흥적인 민주화 시위였기 때문에 시위 지도부가 조직화되지 못했고 소련군의 대규모 탱크 행렬로 인해 봉기는 신속하게 진압되기 시작했다. 동베를린 등지의 주요 봉기는 17일 사실상 진압되었지만 동독 전역의 수백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저항이 이어졌고 최종적으로 사태가 막을 내린 것은 6월 24일이었다. 동독 정권에서 밝힌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125명이지만 서독 정부는 시위 진압 이후 동독 정권에게 체포되어 [[사형]]당한 희생자들까지 합쳐 500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